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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 김포기독교연합회 대표회장  
  •           문광열목사
아무래도 더욱 큰일이 벌어질 것 같아 인류는 무서워 벌벌 떨고 있는 것이 오늘의 세태임을 부인할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지구 도처에서는 강진의 발생으로 수만 여명이나 죽거나 실종됐지만 아직도 여진이 무서워 밤거리를 헤매고 있고, 이스라엘에서는 아리엘 샤론이 총리에 당선하므로 중동(中東)평화에 먹구름이 낀 것이 또한 그렇고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는 (NMD)체제 구축을 놓고 첨예한 대립과 갈등으로 맞서고, 우리국민도 정쟁이 무서운지 오죽하면 “여든 야든 지겹다. 경제나 살려라”라고 속내를 드러낼까.


정수동의 풍자

조선시대에 조두순(趙斗淳)이란 정승이 있었다. 어느 날 그가 여러 대감들과 한가로이 덕담을 나누는 중에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다. 그때 여러 대답이 나왔다. 도둑이 무섭다는 대감도 있고, 도깨비가 무섭다는 대감도 있었고, 불이 제일 무섭다는 대답도 나왔다.
여러 대답을 듣고 있던 당대의 선비요 시인 정수동(鄭壽銅 1808-1858)이 “저는 호랑이를 탄 양반이 제일 무섭습니다”라고 했다. 이 말은 당시 양반들의 폭정과 수탈을 풍자해서 한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대감들은 당장 안색이 변했다. 그때 한 대감이 정수동이 한말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러자 조두순이 나서서 “자네가 비록 화려한 집에서 노란 수염으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지만 아마 백년 후에는 정수동은 알아도 대감을 아는 사람은 없을 걸세, 그러니 아예 본전도 못 건질 소리는 그만두게”라는 말로 입을 막았다. 그러자 정수동을 비난하던 대감은 얼굴을 붉히고 자리를 떴다.
가진 것은 없어도 정수동은 사회의 부조리와 지배층의 비리에 대해서는 거침없이 예리한 풍자의 칼날을 들이댔던 인물이었다.
아마 모르긴 해도 작금 이 시대의 정수동이 등장해서 호랑이를 탄 대감들에게 바짝 정신차리도록 해주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자못 궁금하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국민에게 “세상에서 재일 무서운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 예측하건대 옛날과는 판이한 대답이 나올 법도 하다. 혹 그 대답이 ‘하나님’그럴 수도 있겠다. 오늘날 지진, 폭설, 폭우, 한파를 본다면. 또 그리고 ‘돈’그럴 수도 있다. 돈 때문에 벌어지는 무서운 일들이 한두가지가 아니지 않은가? 그러면 필자가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정수동처럼 시비지단(是非之端)을 고려해서 먼저, 무인카메라를 꼽겠다. 솔직히 말해서 필자는 무인카메라가 귀신보다도 더 무섭다.
굳이 그 요인을 고해성사 한다면 지난해 가을 서울 순환도로에서 앞차와의 흐름을 거부했고 뒤차의 투정을 아랑곳 않고 87㎞로 주행했는데 몇 일전 귀신같이 찾아온 벌금 청구서가 그것이다. 다시 말해서 무인카메라는 무섭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고 실소케도 하는 것이 숨김없는 고백이다. 처음, 자동차 면허증을 손에 쥘 때 각오한 바가 없진 않다. “나는 교통법규를 철저히 지킨다. 그것도 평생”선서를 하는 마음으로 핸들의 신조를 다짐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저간에 심심찮게 당하는데 하물며 업무에 쫓기거나 초보운전자는 오죽할까? 그렇다구 해서 법규를 무시하자는 성토는 물론 아니다.
단지 상황윤리나 불가항력 같은 경우라면 참작할 줄 아는 은혜스러운 정치를 운전자들이 원하고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어느 선까지는 사랑의 충고성 메시지를 발송해 준다면 교통 캠페인도 되고 양심과 사랑운동의 시너지 효과에도 지대한 도움이 될 터이다.


철인의 자존심

다음으로 무서운 것은 편파보도를 일삼는 일부의 방송매체가 호랑이를 탄 대감보다 더 무섭다.
특히 공영방송에 나와 논어이야기중 시청자를 현혹하고 신앙인에게 영적부흥은 못할망정 역설과 패담으로 모욕감을 주는 김용옥씨는 다시“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을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34)라고 한 바울의 고백을 재조명해 보고 필부지용(匹夫之勇)의 허세나 역설(逆說)적 성서론은 자제하고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배워 지성(知性)에 잠재하고 있는 믿음을 가시화하기 바란다.
무슨 뚱딴지같은 추리냐고 할지 모르나 철인 키엘 캐고울(Kierkeguaol)은 “철학은 명상에 달려있지만 기독교는 역설에 달려 있다”라고 했고, 기독교 변증학자 터틀리안(Tertullan)도 “기독교는 불합리하다 그러므로 나는 믿는다”라 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역설은 철인의 자존심과 사조(思潮)로 받아들여도 될까? 허기야 프랑스의 사상가 파스칼(Pascal)도 그가 저술한 ‘팡세’에서 “진정한 웅변은 웅변을 경멸하고 진정한 도덕은 도덕을 무시한다.
또 철학을 멸시하는 것이 정말 철학을 하는 것이다”라는 역설론으로 갈채를 받았으니 할말은 없다. 그러할 찌라도 역설은 끝이 짧아야지 길면 구상유취(口尙乳臭)하게 들려 고명(高明)하다는 근간의 칭찬은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다. 또 공용방송이 편파나 과장된 미디어 모포시스를 일삼아서 결국 우리국민의 정서를 사분오열 깨뜨리면 국익에 도움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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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4-04-20 09:3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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