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한기총 대표회장인 이영훈목사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일부 회원교단 인사들이 한기총 개혁을 빌미로 이영훈목사에 대한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내고 한기총 일부 인사들에 대한 치리를 요구하는 등 소모적 논쟁이 시작됐다.
그러나 이들의 속내는 한기총 개혁보다는 한기총내 친이영훈 세력들을 제거함으로서 이영훈 대표회장을 고립시켜 한기총의 실권을 장악하기 위한 포석으로 보여진다. 더 나아가서는 자신들이 지지하는 특정인사를 차기 대표회장으로 옹립하기 위한 수순이라는 여론이 지배적이다.
이들이 개혁을 기치로 내세우며 기자회견을 통해 해임을 요구한 인사들에 대한 이유들을 살펴보면 설득력이 턱없이 부족한 억지주장들이 많다.
윤덕남 총무에 대한 부분도 그렇다. 한기총 임원회가 지난 3월 21일 개최된 제26-3차 임원회에서 보류되었던 총무에 윤덕남 목사를 임명하였다. 만일 윤총무에 대한 해임을 요구하려면 임원회 당시 이의를 제기했어야 했다. 이번에 윤총무의 해임을 요구한 일부 임원들(공동회장 등)은 당시 임원회에 참석한 인사들로 임원회때는 동의를 했다가 지금에서야 해임을 요구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대위원장 박중선목사에 대한 임명은 박목사 뿐 아니라 모든 임원들에 대한 임명은 대표회장의 고유권한이다. 해임사유를 들고 나오는 이들 중에는 박목사가 한기총에서 영구제명된 인사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박목사는 2014년 2월 24일에 개최된 제25-1차 임원회에서 이준원, 김원남 목사와 더불어 영구 제명 결의를 했다. 그러나 당시 대표회장이었던 홍재철 목사는 모든 것을 용서하고 화합하는 차원이라며 2014년 4월 17일 개최된 제25-3차 임원회에서 박목사 등에 대한 징계를 바로 해제시켰다.
또 이영훈목사의 좌장격인 이강평목사(서울기독대학교 총장)에 대하여 감리교 출신 교수 임용과 관련해 이미 세례를 받은 사람을 그리스도교회협의회 교단에서 침례를 주었다는 이유로 재침례파 운운하며 이단시비로 몰아 제명을 요구하는 것은 신학의 부재와 교회사를 전혀 모르거나 현실을 부정하는 처사로 유치하기 짝이 없다.
재침례파(재세례파)는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급진적 개혁을 따른 기독교 종파로서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고 카톨릭에서 받은 세례(영세)를 인정하지 않으며 그리고 침례를 받아야 만이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 극단적인 종파를 일컫는다.
현재 세계 그리스도의교회협의회든 한국의 그리스도교회협의회든 다른 교단에서 세례(약식)를 받은 사람이 이 교단에 교적을 옮긴 후 성도 본인이 원하면 교단의 전통에 따라 침례를 주고 있는 상황이다. 이는 침례교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그교협 교단에서 목회자가 되길 원하는 목회자의 경우는 교단의 전통을 더더욱 따르고 있다.
한국그리스도의교회 관계자는 “타 교단에서 받은 세례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준 세례를 모두 인정하고 있다. 성도들의 경우 자유스럽게 하고 있다. 다만 직분자이거나 특히 목회자의 경우는 교단의 전통에 따라 시행하는 것이지 절대적인 교리는 아니다” 라고 밝혔다.
또 이강평목사도 “해당 교수가 학교에서 침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교단에서 시행한 것이다. 타교단 세례를 인정하고 있다. 해당 교수는 다만 교단의 전통에 따라 침례를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며 “가령 감리교 목사가 통합측 목사가 되려면 편목과정을 통해 통합측 신학을 이수해야만 통합측 목사로 인정하는 경우와 같다” 고 말했다.
이같은 전통은 침례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 신학계의 거장이며 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고 박형룡박사(총신대학교)도 미국에 유학하여 1923년 9월부터 1926년 5월까지 미국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신학사(Th. B.)와 신학석사(Th. M.)학위를 받았고 그 이듬해 1927년 미국 켄터키주 남침례교 신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는데 박형룡목사는 침례교 계통의 이 대학에 들어갈 당시 침례를 다시 받았었다.
만일 이들의 주장처럼 그리스도의교회나 침례교 등에서 다시 침례를 주었다는 것을 문제삼아 이단시한다면 우리나라를 비롯해 세계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의교회 및 침례교 등 침례를 시행하는 교단들은 다 이단이 되고 만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신자를 보유하고 있는 교파가 바로 침례를 시행하는 교파들이다.
한국그리스도의교회협의회나 침례교는 재침례파의 주장과는 전혀 다르다.
그리스도교회협의회를 이단시비에 끌어들이려는 시도는 트집잡기에 불과한 억지 주장이다.
한때 한기총이 이단시비 등 많은 혼란들이 있었으나 홍재철목사 후임으로 이영훈 목사가 대표회장이 된 이후 급속도로 안정을 되찾았으며 한국교회 하나됨과 화합을 위해 개혁드라이브를 진행하고 있는 싯점에서 인사문제에 불만을 가진 일부 인사들이 개혁이라는 미명아래 법원에 가처분 신청을 내거나 기자회견을 통해 딴지를 거는 것은 또다시 한기총을 수렁으로 몰고 가려는 의도로서 비판받아 마땅하다.
이는 이영훈 목사가 모처럼 개혁의 기치아래 분열된 한국교회를 하나되게 하고 화합해 가려는 하모니 리더쉽에 심각한 타격을 주려는 일탈된 행동으로 여겨진다.
개혁이라는 단어를 아무렇게나 사용해서는 안된다. 개혁이란 잘못된 길을 걸어갈 때 필요한 것이 개혁이다. 한기총을 개혁하고 한국교회 화합을 위해 심혈을 쏟고 있는 이영훈목사를 향해 개혁하겠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번에 개혁을 주장하고 있는 이들 중에는 남을 개혁하기에 앞서 자신을 개혁해 나가야 할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다.
반이영훈 목사 세력들 가운데에는 이번 한기총의 이단시비 특별 재검증에 불만을 갖고 제동을 걸기 위한 행동의 일환이라는 분석도 팽배하다. 만의하나 류광수, 박윤식 목사가 이단으로 결정될 때에는 심각한 타격을 입게되는 인사들과 교단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영훈 목사에게 대표회장의 남은 임기를 후임으로 인계한 홍재철 목사의 결단을 높이 치하한다. 이영훈 목사가 물려받은 임기를 성공적으로 잘 마칠 수 있도록 직전대표회장인 홍목사는 아낌없는 성원과 도움을 주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이 훌륭한 지도자로서의 품격을 지켜갈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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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참고적으로 재침례파가 무엇인지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 열거한다
위키사전에는 재침례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재세례파(再洗禮派) 또는 재침례파(再浸禮派, Anabaptist, 그리스어: Αναβαπτιστές)[1]는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급진적 개혁을 따른 기독교 종파를 가리킨다. 그 사상을 이어받고 있는 현대의 개신교 교파들로는 아미시파, 후터라이트, 메노나이트 등이 있다. 전 세계적으로 120여만 명의 교인들이 있으며, 대한민국에도 재세례파(재침례파) 교회가 한 곳 있다.
이들은 유아세례뿐만 아니라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받은 세례도 무효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은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여기서 그 이름이 유래한다. 유아 세례를 반대하는 교파들은 침례교도 역시 마찬가지이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무효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대다수 기독교 교파에서는 세례가 죄의 용서와 구원의 상징적 의미가 있기 때문에 사람이 일생 한 번만 받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재세례파는 이에 반대한 것이다.
재침례파의 유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재침례파라는 이름이 불려진 유래는 이렇다. 그 시기에는 거의 모든 사람이 유아세례를 받은 후 성인이 된 다음에는 입교 문답만 했으므로, 성인에게 세례를 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재침례파들은 죄를 사함받고 거듭난 사람들에게 다시 세례를 베풀었기 때문에 재침례파란 이름으로 불려진 것이다.
유아세례가 카톨릭에 자리잡게 된 과정은 다음과 같다. 2세기 말에 이레니우스는 침례가 영혼을 깨끗케 하는 것이라고 했으며, 오리겐은 출생의 오염을 씻기 위해 유아세례를 받는다고 했다. 초대교회 시대에,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하신 말씀에서 ‘물’을 ‘세례’로 오해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여긴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캐롤Carrol 박사의 「피 흘린 발자취」에 의하면, 침례를 받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잘못된 교리가 초대교회에 들어와 뿌리를 내리면서 어떤 교회의 인도자들은 침례가 구원의 방법인 것처럼 가르쳤다. 그러다 보니 침례를 일찍 받을수록 좋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그 결과 유아세례가 생겼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왕이면 일찍 구원받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여 받아들이기 시작한 유아세례가 교회의 전통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251년에 참된 교회들은 잘못된 유아 침례를 받아들이는 교회와는 교제를 끊겠다고 선언했다고 캐롤 박사는 말하고 있다.
AD 416년, 로마카톨릭은 유아세례에 관한 법령을 만들었다. 이 새로운 법률로 말미암아 유아세례는 의무가 되었다. 국가교회주의자들은 그 법령을 거부하는 이들에게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빼앗았다. 그때부터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산골짜기나 동굴 속에서 피난처를 찾아야 했다. 유아세례가 법령으로 제정된 지 10년 뒤인 AD 426년부터 10세기 이상 기독교회의 암흑기가 시작되어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무시무시한 박해를 받았다.
중세기에 스위스 취리히에서 일어난 ‘스위스 형제단’이 재침례파의 시원始原이라 할 수 있다.
스위스 취리히에서는 츠빙글리의 지도 아래 1523년에 공개토론회를 개최하면서 교회 개혁을 위한 노력이 구체화되고 있었다. 츠빙글리는 다정다감한 인품, 예리한 판단력, 아름다운 음성, 뛰어난 화술을 골고루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복음주의적 개혁자로서 사람들을 이끌어 가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강단에서 헬라어 성경을 펴놓고 직접 해석하여 재능 있는 많은 젊은이들을 이끌었다. 그런데 그의 개혁 노선이 점점 보수적인 경향을 나타내자 그의 주위에서 헬라어 고전을 연구하던 많은 젊은이들이 점차 츠빙글리와 다른 견해를 갖기 시작했다. 콘라드 그레벨, 펠릭스 만츠, 안드류 카스텔버거 등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츠빙글리의 개혁운동에 만족하지 못했다.
1523년부터 그레벨 등 스위스 형제단과 츠빙글리 사이에는 견해차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교회의 본질 및 유아세례에 대한 이견(異見)이었다. 미사 및 성상(聖像)들에 대해서도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하는 츠빙글리나 시의회와 달리, 스위스 형제단은 철저하고 즉각적인 개혁을 주장했다.
1524년에는 분열이 일어났다. 츠빙글리는 성상이나 미사의 폐기를 시의회와 절충하려 했으나 그레벨은 관료들이 교회를 지배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국가관과 교회관 등에서 분명한 차이가 나타난 것이다. 그레벨과 그의 동료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모든 죄를 씻고 거듭난 성도들로만 구성되는 참된 교회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츠빙글리와 스위스 형제단은 결별한다.
침례교 학자 블란케Fritz Blanke에 의하면, 콘라드 그레벨과 그를 좇는 사람들은 1524년에 신약성경을 기초로 하여 ‘침례는 회개가 전제되어야 하고,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침례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스위스 형제단’의 본격적인 시작이었으며, 재침례파 운동의 역사적 시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