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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창17:16~22

이삭의 이름은 하나님이 직접 지어준 이름입니다. 하나님은 태어날 아기 이름을 이삭(뜻:웃었다. 그가 웃는다)이라 짓게 명하십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으로부터 이삭 출생의 예언을 전해 듣자 두 사람이 웃음으로 반응을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수태고지를 들을 때에 아브라함과 사라의 웃는 웃음은 어떤 웃음일까 그 뜻을 알아보자?


“천사가 아브라함에게 아내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에서 속으로 웃고” (창18:9~14).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잉태를 예고했을 때 두 사람은 다 같이 웃었습니다.
하님이 두려워서 드러내 놓고 웃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은밀하게 웃었던 것입니다. 이 웃음은 100세, 90세된 자신의 몸을 보면서 젊은이처럼 아기를 갖는다는 것에 대해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웃은 것입니다.


이는 불신의 웃음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받아들이는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미소의 웃음이었던 것입니다. 이는 아직 저들이 성경의 진리인 죽은 자를 살리는 부활의 섭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또한 아담으로부터 타락한 인간의 의식으로는 영원한 생명, 전능한 생명의 하나님을 인식한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보여 줍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친구처럼 대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친구같이 대하였으므로 노하시지 아니하시고 수태고지가 농담이 아님을 가볍게 환기시켜 주십니다 (약2:23 사41:8).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말씀이며, 진리이며, 생명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는 너희의 친구라 하시며 나는 친구를 위하여 죽노라 말씀하십니다. 그렇다. 내가 진리, 생명, 사랑에서 떠나 사랑도 ,생명도, 알지 못하는 삶은 진리와 사랑과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내 신앙은 지금쯤 어디에 있는가 생각해 보십시다.


두 부부가 속으로 웃는 웃음을 하나님이 알고 꾸짖자 사라는 당황하고 믿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웃지 않았다고 부인한다. 그리고는 비로써 이것이 농담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창18:13~14).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창17:19).

왜 하나님은 이름(웃는다)을 이삭이라 짓게 하며 그 의미는 무엇인가?

아브라함 부부는 이삭으로 인하여 두 번 웃게 됩니다.
불신으로 처음 웃었던 부부는 이삭이 태어나자 진정한 기쁨과 환희와 감사의 웃음을 웃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아들이삭을 낳을 때에 백세라 사라가 가로되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창21:5~6).


이 웃음은 속으로 웃는 웃음이 아니라 진정 기쁨으로 웃는 웃음입니다.
불신의 웃음이 변하여 믿음과 감사의 웃음으로 바뀝니다.
우리에게 있어야 할 진정한 웃음 이 웃음입니다.
우리에게 꼭 있어야 할 웃음입니다.


부활의 소식은 합리적으로 해명되거나,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믿음으로 만 받아들일 수 있는 단어입니다.
이는 아브라함 부부가 하나님이 언약의 자식을 약속할 때 합리적 사고로 이해되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과 같다 하겠습니다.
지금에 성도들이 자기와 뜻이 같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다 들이고 아니면 정죄하고, 판단하면서 한 영혼을 죽입니다.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눅12:10).


왜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토록 무지합니까?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 하는도다”(막7:7).
자기 생각으로 즉 자기에 영적인 수준에서 예배드리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상대하여 비교하는 인간의 의식은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이해가 되어 질 때에 받아들이려는 의식입니다.
이 의식은 타락한 아담이후의 모든 인간 실존의 모습입니다.
이 의식으로는 상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생명은 그리스도의 의식으로만 인식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 의식은 성령이며, 생명이며, 사랑이며, 빛이며, 온 우주이다.
이 그리스도의 성령의 의식(믿음)이 아니면 아브라함의 믿음의 의식을 느끼고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말씀의 소식을 들을 때 많은 사람은 반신반의하고 웃습니다.?


그러나 끝날 부활을 받아 아버지 앞에 서는 그날 환희와 기쁨의 웃음을 웃을 수 있는 자가 승리의 웃음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승리의 웃음을 웃을 때 까지는 세상에 기쁨을 구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두 번의 웃음은 곧 우리가 웃어야 할 웃음임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삭이 태어난 때는 언제입니까?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한 때는 언제입니까?
“내 언약은 내가 명년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창17:21).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창18:10).


하나님의 언약은 봄이었습니다. 새 싹이 돋는 봄에 이삭은 태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달리신 때가 유월절 절기입니다.
유월절은 봄의 절기입니다.


봄은 계절적 봄이지만 상징으로는 생명의 봄, 만물이 소생하는 부활을 뜻합니다. 만물이 소성하는 이때 그리고 고목나무인 두 부부에게 생명이 태어남이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예수님도 봄에서 겨울(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계절적 봄을 들어서 하나님에 섭리의 봄을 나타내 주시므로 성도의 부활의 때도 봄이 돼야만 할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 합니다.


우리에게는 진정한 기쁨의 웃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썩어질 것에 대한 기쁨 보다는 진정한 기쁨(구원·영생)을 소유해서 웃는 웃음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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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2-11-30 08:3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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