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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어떻게 지킬 것인가 - 김윤태 교수(한복협 신학위원장, 백석대 기독교전문대학원장), 한복협 발표회 원고
  • 기사등록 2022-12-17 11:0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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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석대 신대원 김윤태 교수     ©뉴스파워

  이 글은 지난 9일 오전 7시 서울 강변교회에서 열린 한국복음주의협의회(회장 최이우 목사) 12월 월례 조찬기도회 및 주제 발표회에서 김윤태 교수(한복협 신학위원장, 백석대 기독교전문대학원장)가 발표한 원고이다.


성탄절 어떻게 지킬 것인가

 

크리스마스(성탄절)는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한 생명의 빛으로 오셔서 그를 믿는 자들에게 구주가 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또는 절기)이다. 크리스마스(성탄절)는 종교적인 절기인 동시에 세속적인 절기이다. 크리스마스는 종교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날이지만, 동시에 세속적으로도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은 이들까지, 어느 특정한 기독교 국가에만 한정되지 않고 모든 지구촌 사람들이 다 함께 즐기는 몇 안되는 지구촌 절기이다. 크리스마스 하면 일반적으로 떠오르는 단어들은 선물, 성탄 장식, 캐롤송, 성탄축하 예배 및 행사, 휴일 등과 같은 것이다. 

 

얼마 전만 해도 교회들은 성탄절이 있는 12월 초가 되면 이미 교회당 안에는 성탄 트리를 세우고 교회당 밖에도 반짝이는 오색 전구들로 밝힌 성탄 장식을 함으로 교회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성탄절의 분위기를 띄우고, 성탄 이브에는 각 교육부서들을 중심으로 준비한 성탄 축하 공연을 전 교인들이 함께 모여 즐기곤 하였다. 그리고 성탄 당일 오전에는 기념 예배를 드리며 성가대가 오랫동안 특별히 준비한 칸타타를 보면서 성탄절을 즐겁고 의미있게 보내곤 하였다. 또한 부서별로 성탄 선물교환 모임을 갖기도 하고 성탄 당일 새벽에는 조를 나누어 성도들의 집을 돌면서 새벽송을 한 후 다 함께 모여 떡국을 즐겁게 나누어 먹기도 하고, 그렇게 거두어들인 선물들은 교회 안이나 밖의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웃이나 고아원 같은 시설들에 전달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한때 야간통행이 금지되던 시절에도 성탄절 새벽송 만큼은 허용이 되어 자유를 만끽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성탄절은 기독교 신자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의미있는 절기였고, 또 복음전도의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하였는데, 그동안 교회에 잘 나오지 않았던 신자들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성탄절 때만큼은 친구나 가족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오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일이었다.

 

한편 교회 밖에서도 중요한 관공서나 건물 혹은 광장이나 사거리를 위시하여 상점들마다 성탄 장식이 설치되어 밤거리의 풍경을 바꾸어 놓기도 하고, 상점들마다 틀어놓은 성탄 캐롤송이 온 거리마다 울려 퍼지고 백화점이나 쇼핑센터 등에서는 일찍부터 연인과 가족들을 위한 성탄 선물들을 온갖 장식들과 더불어 풍성하게 진열해 놓고 시끌벅적한 세일행사를 벌이기도 했다. 또한 사람들은 신자든 비신자이든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크리스마스 카드를 구입하여 가족 친척 지인들에게 보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요즘에는 예전과 같지 않게 성탄절 시즌이 되어도 거리에 성탄절 분위기가 도통 실감나지 않을 만큼 조용하기만 하다. 거리에 성탄 장식들도 별로 눈에 띄는 것이 없고 그 흔하던 캐롤송을 길거리 상점뿐만 아니라 라디오에서조차 듣기 쉽지 않을 뿐 아니라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는 사람들도 찾아보기 어렵다. 사람들 사이에 흔하게 주고받던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인사말 대신 “해피 홀러데이!”가 더 보편화된 듯 하다. 교회들도 교회당 건물에 성탄 장식을 하는 교회들이 간혹 드물게 보일 뿐이고 성탄 축하 행사도 예전같지 않게 성탄절날 예배만 겨우 드리는 정도로 형식적인 행사에 그치는 듯하다. 비기독교인들에게는 이제 성탄절 분위기 보다는 연말연시 분위기가 더 의미있는 것이 되었고, 기독교인들 마저도 비기독교인들과 별반 다를 것 없이 성탄절이 다가와도 집 안에 성탄 장식을 하는 가정이 예전만 못하고 특별한 감정 없이 성탄절 아침 예배 참석마저 큰 의미를 두지 않은 채 형식적으로 성탄절을 지내는 것이 보편화된 듯하다. 이런 바뀌어진 성탄절 분위기를 보면서 한편 마음 깊이 안타까운 마음이 들면서 또 한편 과연 우리 교회와 신자들은 성탄절을 이대로 이렇게 보내도 괜찮은 것인지, 성탄절을 의미있게 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고민해 보지 않을 수 없다. 

 

1. 성탄절의 유래

성탄절이 선물을 교환하고 성탄 트리와 장식을 만들고 캐롤송을 부르는 등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지켜지게 된 것은 역사 속에서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다.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성탄절이 세속적인 의미에서 세계인들의 휴일이 되고 축제의 날이 되게 된 계기는 1870년 미국 의회가 12월 25일 성탄절을 국가적인 휴일로 지정한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오늘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의 성탄절 축하 모습은 사실 오랜 역사 속에서 기독교적인 전통과 이교적인 전통이 혼합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최초의 성탄절은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소개되었다. 1886년 12월 24일 스크랜튼 여사는 이화학당 소녀들을 위해 성탄 트리를 세웠고, 1887년 12월 성탄절에 아펜젤러는 배재학당 아이들에게 성탄절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양말에 선물을 담아 학생들에게 주었는데 이것이 한국에서의 첫 번째 성탄 트리와 산타클로스 선물이 되었다. 이후 일제가 패망한 후 미군정 시절 12월 25일을 공휴일로 지정하였고 그것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성탄절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한 것으로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을 기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의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출생 연도와 날자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성경이 이에 대해 명확히 말해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더불어 교회가 종교적 의식으로서 예수님의 탄생을 어떻게 축하해야 하는지도 이렇게 해야 한다고 성경적으로 규정해서 말할 수 없다. 

 

성탄절과 더불어 기독교인들에게 중요한 종교적 행사인 부활절과 관련해서는 성경이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관하여 그 시기와 내용을 시간대별로 자세히 기록하고 있으며 신약성경에 부활절에 관한 암시적인 언급(참고:고전 5:7-8)이 있기도 하다. 부활절은 이미 2세기 중엽부터 기독교의 중요한 절기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이에 비해 성탄과 관련해서는 성경적인 정보가 제한적이다. 비록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한 기사를 소개해 주고 있지만, 요한복음과 바울서신서들에는 이와 관련한 기사가 없다. 뿐만 아니라 복음서에서 소개되고 있는 예수님의 탄생관련 기사들에서도 예수님의 탄생일과 관련한 정보는 제공되고 있지 않다. 또한, 이레네우스(130-200), 터툴리안 (160-225), 알렉산더의 오리겐 (165-264) 등과 같은 이른 시대의 초대교회 교부들의 글에서도 성탄절에 관한 언급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2세기경에 기록된 도마복음서와 같은 외경들에서 예수님의 탄생과 소년기에 대한 언급들이 나타나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예수님의 탄생일에 관한 내용은 없다.

 

예수님의 탄생일과 관련한 관심과 언급은 3세기경부터 나타난다. 알렉산더의 클레멘트는 예수님의 탄생 연도와 날자에 관해 당시 기독교 내에 있는 몇 가지 다른 견해들을 소개해 주는데, 혹은 아우구스투스 28년 파촌(이집트의 월력)월 25일 (5월 20일)로 보거나 혹은 4월 20일이나 21일로 보는 견해들이 있었다고 한다. 기독교 내에 성탄절이 보편적인 절기로 굳어지게 되는 것은 4세기경에 이르러서인데, 서방교회는 12월 25일을, 동방교회는 1월 6일을 예수님의 탄생일로 확정하고 성탄절로 지키게 된다. 그런데 왜 교회가 12월 25일을 성탄일로 정했는지는 명확하게 알려지고 있지는 않다. 다만, 일반적으로 유력하게 알려지고 있는 견해로는 성탄절과 기독교를 로마제국 내 널리 퍼지게 할 목적으로 당대의 이방 절기를 채용한 것이라는 견해이다.

 

당대 로마인들은 12월 중순경에 로마 신화에 나오는 농경신인 사투르누스(saturnus)에게 풍작을 기원하는 사투르날리아 축제를 행하였는데, 그들은 이 때가 태양신 미트라가 탄생한 날로 여겼다. 초대교회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방인들에게 세상의 참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을 기념하는 성탄절을 지키게 함으로 이방 축제를 대신하게 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AD 350년 당시 로마 주교 율리오 1세가 그때까지 로마 사람들의 축제일이었던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정한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성탄일을 12월 25일(서방교회) 또는 1월 6일(동방교회)로 정하게 된 것과 관련한 또 다른 설명은 3세기경 저술가인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가 제시한 것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날과 탄생하신 날이 동일한 날이라는 믿음과 관련하여 설명하는 것이다. 서방교회는 카르타고의 터툴리안 이후 일반적으로 예수님이 운명하신 날을 니산월 14일로 보았는데, 이는 태양력으로는 3월 25일이다. 12월 25일은 이로부터 9개월 앞선 날이다. 마리아의 수태고지의 날과 예수님께서 운명하신 날을 동일한 날로 보는 믿음은 수태고지로부터 만 9개월 후인 12월 25일을 예수님의 탄생일로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동방교회는 수태고지일을 헬라력을 따라 첫번째 봄의 14일 (4월 6일)로 봄으로 따라서 만 9개월 뒤인 1월 6일을 탄생일로 지키게 되었다는 것이다. 

 

2. 성탄절 문화

기독교가 서유럽으로 전파되면서 성탄절 트리장식 등과 같이 성탄절을 지키는 방식에 여러 변화들이 생겼는데, 이 또한 이방절기들의 방식들이 기독교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기독교가 서유럽으로 확장되는 과정에서 선교사들은 이방신전을 파괴하는 대신 교회당으로 개조해서 사용하고 이방절기를 기독교 순교자들을 기리는 절기로 바꾸는 등과 같은 방식으로 성탄절을 지키는 방식 또한 그렇게 변화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전나무와 같은 상록수에 인형과 종 선물장식과 그리고 색색의 전구를 다는 성탄 트리는 성탄절 장식으로 대표적인 것이다. 상록수는 고대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관습이 있었는데, 브리테니카 백과사전에 따르면 고대 바벨론 이집트 로마인들에게서 이러한 관습은 흔한 것이었다. 이런 관습은 북유럽을 중심으로 유럽인들에게서도 흔히 볼 수 있었는데, 유럽인들은 동지가 되면 동지를 기념하는 동시에 악령을 쫓는 의미로 상록수에 등불 등 조명을 달았고 이런 관습은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성탄절을 기념하는 방식으로 흡수되었다. 성탄 트리와 관련한 또 하나의 일화는 마틴 루터와 관련된 것이다. 어느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에 루터가 숲 길을 산책하던 중 전나무 위에 앉은 눈이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을 보며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곧 아무리 초라한 나무라도 빛을 받으면 주변까지 빛을 비추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었다. 이런 깨달음으로 그는 전나무에 눈 모양 솜과 촛불 그리고 리본장식을 하여 ‘이와 같이 빛을 밝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길’ 권하는 설교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루터가 전하고자 한 설교의 내용이 아닌 그가 사용한 나무의 장식을 따라 하기 시작한 것이 성탄 트리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성탄절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대표적인 문화는 산타클로스와 선물이다. 산타클로스란 성 니콜라스(Saint Nicholas)라는 뜻이다. 니콜라스는 4세기경 미라(Myra)의 감독으로서 특별히 남몰래 가난한 자들에게 선행을 많이 베푼 사람으로 알려진다. 니콜라스 사후 이러한 니콜라스의 선행은 노르만족을 통해 유럽으로 전파되었고, 12세기 초 프랑스의 수녀들은 니콜라스 축일인 12월 6일 하루 전 12월 5일에 그의 선행을 기념해 가난한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었다. 이후 이러한 관습은 유럽에 확산되어 12월 6일이 되면 가족 중 한 명이 니콜라스의 분장을 하고 나타나 아이들에게는 칭찬과 선물을 주었는데, 17세기경 미국 신대륙으로 이주한 네덜란드 사람들이 세인트 니콜라스를 ‘산테 클라스’라고 부르게 된 것이 영미권에서 산타클로스가 되었다. 그러다 처음 12월 6일에 행해지던 산타클로스 축제가 뉴욕에 거주하던 네덜란드 이주민들에 의해 12월 25일로 합쳐지면서 오늘날처럼 산타클로스와 선물이 성탄절을 상징하는 것이 되었다. 

 

3. 성탄절 어떻게

성탄절은 말 그대로 세상에 생명의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고 절기이다. 성탄절에 행해지는 문화나 관습은 어쩌면 이교적인 배경이 기독교 문화화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렇게 봄으로 한편으로는 성탄절을 폐지하자는 주장까지도 나올 수 있다. 실제로 종교개혁자 칼빈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연례적으로 지켜오던 축일과 절기들을 폐지하면서 성탄절도 함께 폐지하였다. 이런 칼빈의 입장은 당시 제네바 의회와 충돌을 빚는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후 네덜란드 개혁교회도 이러한 칼빈의 입장을 따라서 1574년 도르트레흐트 총회에서 비록 성탄절과 부활절 그리고 성령 강림절에 그에 관한 설교를 하는 것은 좋다고 여겼지만, 기독교 연례 행사로 이러한 절기를 지키는 것은 모두 취소하고 주일 하나면 충분하다고 결정했다.

 

사실 초대교회는 안식후 첫 날 곧 주일을 축제처럼 여기며 그 날에 모여 예배를 드리며 성찬을 행하였고 주일 외에 다른 특별한 절기를 지키지 않았다. 이러한 초대교회의 관습과 종교개혁자 칼빈의 입장을 따른다면 오늘날 부활절도 성탄절과 더불어 주일보다 더 나은 어떤 특별한 날로 지정하여 축제일로 지키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만약 부활절이 기독교인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절기로 지켜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받아들인다면 성탄절도 동일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만약 성탄절을 부활절과 함께 기독교의 절기로 받아 들일 수 있다면 이제 문제는 성탄절을 어떻게 지키는 것이 성탄절의 참된 의미를 따라 바르게 지키는 것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먼저 성탄 트리와 산타클로스 선물 등과 같은 성탄절 문화와 관습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할까. 이런 성탄절 문화와 관습은 이교적인 배경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폐지해야 하는가 아니면 지속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관하여 마치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성경에는 없고 초기 기독교회가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처럼 이것들이 성경에 없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아브람 카이퍼의 일반은총론을 따라 생각해보면 세상의 문화가 성경에 없기 때문에 또는 비신자들이 만든 것이고 그럼으로 이교적이고 마귀적인 것이기 때문에 교회와 신자는 이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좋은 문화 자체는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임으로 교회와 신자는 이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독교 복음 전도와 기독교 문화확산 및 사회적 교회적 권덕을 위한 선한 목적으로 사용할 자유와 권리가 있다. 문제는 삼위일체란 용어의 사용과 같은 원리로 이런 성탄 트리와 산타클로스 등과 같은 오늘날의 성탄절 문화가 성경의 내용과 가르침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방식으로 바르게 가르쳐지고 그런 의미를 담는 것으로 사용된다면 그것은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나무로 성경에서 묘사된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의 나무로 말씀하신다. 그리고 생명나무의 열매는 자신 안에 있는 생명으로 말씀하신다.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창조된 세상에는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이 사람들에게 빛으로 비추어지고 있다고 성경은 말한다. 에덴 동산의 생명나무는 성자 예수님 자신이고 그 생명나무의 열매는 성자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선물)으로서 영생을 의미한다. 계시록에서도 이 생명나무와 열매는 같은 의미로 나타난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과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은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성탄절 트리는 이런 의미를 담아서 영원한 생명의 나무와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를 상록수 나무와 선물장식으로, 오색 전등은 세상에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를 드러내는 것으로 교회는 가르치고 성도들로 하여금 그렇게 성탄 트리 장식을 실천하게 할 필요가 있다. 성탄 트리가 그렇게 바르게 가르쳐지고 실천된다면 교회 안의 신자와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성탄절의 의미를 바르게 알리는 좋은 성탄절 문화가 될 것이다.

 

산타클로스와 선물 문화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에서 받아들이고 실천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오심을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항상 자신을 가난한 자들과 일치시키셨고, 천국이 가난한 자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성경은 신자들이 참된 믿음을 실천하는 경건의 방식으로 교회 안과 밖의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섬기는 것을 교훈한다. 교회와 신자는 이처럼 예수님의 교훈과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성탄절에 교회 안과 밖의 가난한 자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며, 가족들끼리도 서로 선물을 나누어 줌으로 이처럼 예수님을 따라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는 자와 삶을 살도록 가르치고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탄절의 문화로서 산타클로스와 선물의 관습이 이처럼 성경적 교훈을 바르게 알고 실천하는 도구로 사용된다면 이는 성탄절을 의미있게 지키는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와 성도는 성탄절을 맞아 특별히 세상의 가난한 이웃들에게 산타클로스가 되어 선물을 나누어주는 일을 실천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올해 기독교실천시민단체인 샬롬나비가 올 해 성탄절을 맞아 교회들마다 교회재정의 일부분을 교회 안팎의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를 위해 사용할 것을 제안한 것은 매우 옳은 것으로 교회와 신자가 성탄절의 산타클로스와 선물을 실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한가지 성탄절을 바르게 지키기 위하여 제안하고 싶은 것은 대림절(대강절)을 지키는 것이다. 대림절(Advent)은 초대교회로부터 지켜온 기독교회의 절기로 4세기경부터 지켜지기 시작하였다. 이는 처음에는 주현절 곧 성탄절을 준비하기 위한 의미로 시작되었는데,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주현절 4주 전부터 대림절 절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대림절은 6세기의 그레고리 이후부터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더불어 재림을 기다리는 의미의 절기로 확대하여 기념하게 되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종말에 있을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기념하는 절기가 대림절이다. 그러므로 대림절은 단순히 성탄절을 준비하는 의미를 넘어 이 세상 끝 날에 다시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의미로 지키는 절기이다.

 

대림절을 뜻하는 영어 ‘Advent’라는 말은 ‘오다’, ‘도착하다’라는 뜻의 말이다. 원래 이 말은 로마 제국에서 신적인 명예가 주어진 황제가 즉위한 후에 여러 도시들과 지역을 방문할 때 황제의 방문을 ‘그 분의 방문’(His Advent)이라고 한데서 유래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만이 진정한 우리의 주님이시요 진정한 황제라고 생각한 초대교회 교인들은 이 말을 ‘구세주의 오심’(The Coming of Our Savior) 이라는 의미로 바꾸어서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Advent’라는 말에 나타난 대림절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에 오심을 의미한다. 즉 대림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오심(성육신: Already/이미 오심)과 다시 오심(재림: Not Yet/아직 안 오심)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의 절기이다.

 

매우 이른 초대교회 시절의 성도들은 ‘마라나타’(Maranatha)의 신앙 곧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는 신앙을 고백하였다. 이러한 신앙고백은 계시록 22:20에 따른 것으로,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님께서 역사 안에 이미 오셨다는 믿음과 더불어 동시에 이제 그 주님께서 세상 끝에 다시 오실 것을 믿는 소망 안에서 살았던 것을 드러낸다. 이러한 신앙고백은 성탄절을 맞아 성탄절을 의미있게 지키려는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신앙고백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성탄절과 함께 대림절을 지킬 때 이는 우리에게 두 가지 중요한 신앙적 유익을 준다.

 

첫째는 이로써 그리스도께서 과거에 우리에게 오심으로 우리에게 주신 은총을 감사하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주신 모든 은혜들을 감사하는 감사의 마음을 가족들과 또한 교회의 온 교우들과 함께 나누는 계기로 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평과 원망에서 돌이켜 서로 감사를 나누며 자신이 가진 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삶을 사는 계기로 삼는 것이다.

 

둘째는 세상 끝에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 때에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오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우리 믿음의 소망을 다시 한 번 확실하게 다지는 계기로 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와 우리 가족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를 인정하고 마침내 완전한 그리스도의 의의 통치가 설 때가 올 것을 기대하는 가운데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는 회개와 용서와 새출발의 계기로 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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