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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가짜 신앙이 판치고 있다. - 윤성헌 목사. 올바른 구원 신앙을 회복하라
  • 기사등록 2016-10-05 17:2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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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헌 목사 (교회를 위한 신학포럼 총무) SFC간사, 광주지역 기독학생 총연합회 대표간사, 개혁신앙의 바른 이해를 위한 연구모임 간사, 캐나다 유학생 선교훈련원 총무 등을 역임했다. 고신대학교 일반대학원 기독교 윤리학 박사과정 수료 후 '한국 기독교 세계관 운동과 문화신학'에 관한 논문을 진행 중이다.
윤성헌 목사오늘날 한국교회는 참된 교회의 표지를 점점 잃어가고 있다. 강단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지 못하고 있고 세례는 진심 어린 신앙고백과는 별 상관없이 형식적인 의례로 남발되고 있다. 한 개인의 신앙고백이 교회의 회원이 되는 것과 상관 없어진지는 오래다. 회심이란 단어 역시 너무나도 어색해졌다. 교회 공동체는 거룩성을 상실하였으며 권징은 오래전에 폐기된 구시대의 유물이 되고 말았다. 이런 와중에 교회 안에는 다양한 형태의 잘못된 신앙의 유형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대략 네 가지의 그릇된 신앙의 유형들을 꼽을 수 있는데 이런 모습은 교인들의 신앙하는 동기와 목적, 그 이유를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샤머니즘적 기복신앙

첫째로, 상당히 많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잘못된 신앙의 유형으로 현세 중심적인 ‘샤머니즘적 기복신앙’을 들 수 있다. 이들의 주된 관심은 이 세상에서의 결핍이나 부조리를 극복할 만한 현세적인 가치를 추구하는데 있다. 이 세상에서의 행복이야말로 신앙의 목적이며 주된 관심사다.

많은 사람들이 현세적 가치를 획득하기 위하여 엄청난 정성과 맹렬한 태도로 자신의 종교적인 열심을 드러낸다. 이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열심을 낼 수 있다. 어떠한 종교적 열심을 동원해서라도 이 땅에서 행복할 수만 있다면 충분히 감내할 만하다. 집안이 잘 되고 사업이 잘 되며 자식이 잘 된다면 그로써 족하다. 이들에게 부와 명예, 건강과 무병장수(無病長壽) 등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은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이다.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예배 참석, 기도, 봉헌 등과 같은 종교의식적인 행위나 직분을 맡아 충성, 봉사하며 교회를 섬기는 일 등은 모두 ‘이 땅에서’ 지복(至福)을 누리기 위한 ‘자기 공로적인 노력’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이들에게 사후세계는 그다지 관심 있는 일이 아니다. 혹여 천국이 있다면 그것마저도 자신의 행복에 도움이 되기에 이들은 이 또한 덤으로 쟁취하기 위하여 열심히 예수를 믿는다.

결국 이들에게 모든 종교적인 노력은 철저하게 오로지 ‘자신의 행복을 위한 것’으로 환원되고 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 하나님은 이들에게 결국 자신이 쟁취하고자 하는 ‘무한행복(無限幸福)을 위한 도우미’에 지나지 않는다.

감정적 체험신앙

둘째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반지성주의적(反知性主義的) 성향을 띠는 ‘감정적 체험신앙’이다. 이것 역시 현세 중심적 신앙의 일종인데, 타락한 이 세상이 가져다주는 영적 혹은 정서적 결핍으로 인하여 발생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깊은 의식 속에는 본능적으로 영적인 고독감이 자리하고 있다.

칼뱅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마음속에는 비록 그들이 타락했을지라도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내밀한 갈망이 숨겨져 있다. 이를 가리켜 칼뱅은 모든 사람들에게 내재한 ‘종교의 씨앗’이라고 말한 바 있다. 사람들은 인생을 살면서 자신감이 결여되거나 어려움에 처할 때 말할 수 없는 정서적인 허탈감에 빠져든다. 그러다가 치명적인 아픔과 상실감을 경험한 이후에는 절대적인 존재를 의지하려고 한다. 인간관계로 통한 아픔이든 미래를 향한 인생의 좌절 때문이든, 그렇다.

이러한 정서적 상처는 정신적인 아노미 상태에서 건져줄 구원자를 찾게 하는데, 바로 이것이 반지성주의적인 체험적 신앙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의 신앙고백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무엇보다 영적 공허감을 채워줄 수 있는 감각적이고 정서적인 영적 체험이면 족하다. 그래서 이들은 경배와 찬양모임이나 신유은사집회 등과 같은 열광적인 모임을 즐겨 찾는다. 이들의 뜨거운 열정과 간절한 마음의 이면에는 영적 공허감을 채워줄 강렬한 무의식의 욕구가 깔려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에 더하여 어떤 이들은 수많은 영적 은사를 추구하려는 신비주의적인 경향을 띠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열망은 잃어버린 영적 자존감을 강화하려는 동기에서 비롯된다. 이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존재일까? 하나님은 심리적 상실감을 위로하는데 도움을 줄 ‘카운셀러’에 불과할 뿐이다.

도덕주의적 신앙

셋째로, 보다 세련되고 고상한 ‘도덕주의적 신앙’을 지적할 수 있다. 기독교는 죄, 곧 하나님 앞에서 불순종한 에덴의 원초적 사건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에덴의 이야기는 단지 부조리한 이 세상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를 가져다 주는 신화(神話)에 불과할 따름이다. 이런 입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존재일까? 그는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건져줄 구원자일까? 아니면 우리에게 윤리적 삶을 도전하는 도덕 선생일까? 이러한 입장에서 예수는 단지 우리가 본받아야할 최상의 도덕적인 모범이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에게 고상하고 숭고한 도덕적 삶을 교훈하는 살아있는 윤리 교과서에 다름 아니다.

결국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는 훌륭한 도덕적 스승인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기 위함이다.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정신으로 자신을 내어버린 희생의 삶을 재현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불교의 자비(慈悲)와 유교의 인(仁)과 마찬가지로 기독교가 지닌 숭고한 사랑(愛)의 정신을 따라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실제로 많은 교인들이 기독교의 중요한 임무를 불의한 사회구조의 개혁이나 구제와 자선을 통한 사회봉사로 생각하는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의 교회에 대한 비판 역시 이러한 도덕적인 잣대에 의해서 비롯되는 실정이다. 신선한 이미지로 매스컴을 통하여 각광을 받고 있는 교회들의 평가는 바로 이러한 도덕적인 이미지에 기초하고 있다. 반대로 윤리가 실종된 한국교회에 대한 비판의 이면에도 이러한 기독교에 대한 윤리적 이미지가 자리한다.

진리에 대한 바른 이해와 올바른 신앙고백보다도, 교회가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과 교리에 대한 평가보다도 목사의 인격과 도덕적 고매함이 강조되고 교회의 윤리적 평판이 부각되고 있는 현실은 바로 도덕주의적인 신앙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에게는 하나님이 어떤 존재일까?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 윤리규범을 제공하고 그렇게 살도록 도전하는 ‘엄격한 윤리교사’에 다름이 아니다.

종교의식적인 신앙

넷째로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발견되는 유형은 형식과 습관에 길들여진 ‘종교의식적인 신앙’이다. 이러한 신앙은 대개 모태신앙을 비롯해서 어렸을 적부터 신앙생활을 해온 경우에 종종 나타나게 되는데, 장성한 어른이 된 경우라도 올바른 구원신앙에 대해 배우지 않고 오랜 세월을 그냥 흘러 보내는 경우에 발견된다.

이러한 경우, 사람들은 주로 앞선 선배 교인들의 신앙과 소속된 교회의 신앙의 스타일을 신앙의 전형(全形)으로 삼는다. 이들은 습관적으로 성경을 보며 주기도문을 외우고 찬송을 부르며 예배에 참석한다. 그리고 교회에서 실시하는 각종 행사에도 참여하며 다른 교인들과 함께 인간적인 친밀한 유대를 도모하기도 한다. 이들은 이와 같이 다양한 종교의식에 참여하는 것으로써 자신을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고 여긴다. 이러한 습관적인 종교의식적 신앙으로 자신을 진정한 기독교인으로 여기며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은 다른 종교에서도 볼 수 있는 종교적인 신앙과 결코 다르지 않다. 이것은 무늬만 기독교이고 이름만 기독교일 뿐 신앙의 본질은 다른 여타의 종교적인 신앙과 다를 바가 없다. 이러한 유형의 신앙의 특징은 신앙의 내용보다 외형적인 겉모양만을 추구하는데 있다. 마치 중세의 로마 가톨릭이나 종교개혁 이후의 국가교회에서 볼 수 있듯이 대부분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무미건조한 의식주의적인 신앙일 뿐이다.

모태신앙의 경우, 때때로 신앙의 정체성과 관련한 문제로 고민에 빠지기도 하지만 올바른 신앙의 확신을 가지지 못하게 될 때에는 기독교에 대해 극단적으로 반발하며 심지어는 신앙 자체를 포기하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랫동안 계속되어온 습관적인 신앙을 고수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경건의 모양만을 지닌 채 나름의 신앙생활을 관습적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결국 이들에게 하나님은 종교적인 열심을 가지고 찾았던 ‘헬라인들의 알지 못하는 한 신(神)’일 수밖에 없다.

올바른 구원신앙의 필요성

이러한 잘못된 신앙의 모습들은 외형적인 '무늬'만 기독교의 모습을 띨 뿐 참된 신앙과는 거리가 멀다. 성경이 계시하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는 무관하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대체 현대인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죄와 사망,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라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걸까?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복음'은 과연 필요하기나 한 걸까? 어쩌면 한국교회의 윤리실종과 영적 무능력은 '가짜신앙'과 '유사 그리스도인'들이 판을 치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본질이 사라진 교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다. 복음이 사라진 곳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약동하는 생명의 역사가 있을 수 없다.

교회의 윤리적, 영적 타락으로 인해 오히려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교회를 떠난다는 '가나안 교인'들이 늘어만 가는 웃지 못할 현실 가운데 오늘날 황폐화된 한국교회의 영적 회복은 도무지 불가능한 것일까? 가슴이 답답하다. 복음을 통한 성령의 역사, 올바른 구원 신앙의 회복이 절실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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