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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 직원 찾기 어렵고 경찰에 신고하라 미루고… 은행들 행태 도마에
금융사기 전담 직원 등 피해자 구제 의무화 시급
석모(73)씨는 지난 5일 난생 처음 인터넷 뱅킹을 이용했다가 날벼락을 맞았다. 부인의 뇌경색 수술비 등으로 3년간 모은 3,400만원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것. 돈은 이날 오후 3시45분부터 100만~200만원씩 18차례에 걸쳐 누군지도 모르는 7명의 계좌로 빠져나갔다.

석씨가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농협'을 입력해 들어간 홈페이지는 가짜였다. PC가 악성코드에 감염돼 벌어진 일이었다. '금융사기 예방을 위해 보안카드 번호를 적으라'는 팝업창의 안내에 따라 입력한 숫자들은 '파밍'(Parming) 범죄자들에게 고스란히 넘어갔다.


석씨는 바로 농협 콜센터에 전화를 했으나 영업지점에 가보라는 답만 들었다. 부랴부랴 찾아간 영업지점에는 전자금융사기 피해를 상담할 수 있는 직원조차 없었다. 한 직원은 석씨가 접속한 가짜 농협 사이트를 진짜로 착각하기까지 했다. 석씨를 세워둔 채 30분간 본사와 통화한 지점 직원은 "우리는 책임이 없으니 경찰에 신고하라"고 했다.

6일 사건을 접수한 서울 수서경찰서가 서둘러 7개 계좌에 대해 지급정지를 신청, 석씨는 그나마 500여만원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은행이 사고 직후 적극 나섰더라면 피해를 줄일 수 있었던 셈이다. 석씨는 "어렵게 모은 돈을 어처구니없이 빼앗겼는데 은행에서는 책임이 없다고만 하니 이젠 죽는 일만 남았다"며 한숨을 쉬었다.

경찰청에 따르면 파밍은 올해 1~7월에만 1,263건(피해액 63억여원)이 발생했다. 휴대폰 문자메시지의 웹사이트를 클릭하면 소액결제 인증번호를 빼내가는 스미싱은 작년 1월부터 올해 6월까지 1만8,631건이 발생해 37억여원의 피해액을 기록했다.

파밍, 스미싱(Smishing) 등 전자금융사기 피해가 날로 늘고 있지만 금융기관들이 개인 과실이라는 이유로 적극적인 조치를 하지 않아 비판을 받고 있다. 은행들은 소비자보호를 전담하는 부서를 두고 있지만, 전자금융사기 피해는 구제하지 않는다. 한 은행 관계자는 "본사 인터넷뱅킹 사이트가 해킹 당해 일어난 피해만 구제한다"며 "유사 사이트에 접속해 개인정보를 제공한 것은 개인의 책임이므로 구제할 의무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피해자들은 자구책으로 은행을 상대로 민사소송에 나서고 있다. 4,000여명이 가입한 '금융피해자 모임' 인터넷 카페에는 하루에도 10여건의 민사소송 문의 글이 올라온다. 6일 4,000여만원을 파밍 등으로 빼앗긴 강모(42ㆍ여)씨는 "소송이 오래 걸리고 돈도 많이 들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면서도 "승소한 사례가 거의 없어 중도 포기하는 사람도 많다고 들었다"며 불안해했다. 실제로 법조계에 따르면 은행의 관리감독 소홀 책임을 묻는 소송 중 승소한 적은 단 한 건도 없다.

김경환 법무법인 민후 대표 변호사는 "국내 금융기관들은 돈을 잠시 맡아주는 기관일 뿐 전자금융사기 범죄에는 책임이 없다는 식"이라며 "피해자가 50만원 안팎의 금액만 책임지도록 하는 외국의 금융기관들과 비교된다"고 말했다. 그는 "국내 제도는 금융기관의 면책 범위가 너무 넓다"며 "금융기관의 피해구제를 의무화하도록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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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3-09-12 17: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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