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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경애 수필가


여고 시절에 시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으리오만 나는 유독 시를 좋아했다. 지금도 암송하는 시가 여러 편 있을 정도로 좋아하지만 어떤 시는 내용보다 제목이 더 좋았다. 그중 하나가 바로 홍사용 님의 “나는 왕이로소이다”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자신을 ‘눈물의 왕’이라고 표현했다.


그분이 눈물의 왕이라면 눈물의 여왕이라 해도 하나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잘 우는 울보가 여기에 있다. 나는 자타가 공인한 눈물의 여왕이다.


나의 눈물에 관한 이야기는 아주 어린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영유아기 시절엔 하도 잘 울어 망태 할아버지에게 준다는 협박(?)까지 했다고 한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조금만 슬픈 이야기를 들으면 눈물부터 흘렸으니 나의 막내 삼촌은 늘 나를 ‘울보’라고 놀리곤 했다. 그렇게 잘 우는 내가 잘못하여 꾸중을 들을 때도 마찬가지로 울었다. 그런 나를 보면서 모든 것을 눈물로 해결하려 한다고 나무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일부러 눈물을 흘려 해결하려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또한 공항은 이별하는 사람, 또 오랜만에 반갑게 만나는 사람이 어우러지는 곳이기에 그곳에 가기만 하면 모르는 사람의 그러한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러니 딸을 유학 보내 놓고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말할 필요가 없다.


  
 

내가 주책없을 만큼 눈물이 많은 것을 굳이 탓하자면 나의 엄마를 닮은 탓이다. 엄마는 눈물이 많으면 울 일이 많이 생긴다고 참으라고 하시면서 나의 눈물 많음을 걱정하시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참는다고 나오는 눈물이 안 나오느냐고 볼멘소리로 반문하기도 했다. 눈물이 나면 참으라는 데 그 참는 것도 정도가 있는 것 같다. 정말 다른 것은 다 참을 수 있는데 나오는 눈물을 참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리만치 힘들다.


눈물의 여왕인 나는 기도 시간도 예외가 아니다. 혼자 기도할 때는 거의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데 그러한 모습을 여러 번 본 어느 장로님이 내가 불치병에 걸려 그렇게 간절히 울면서 기도하는 것 아니냐고 조심스레 묻는 일도 있었다. 그 후, 나는 교회에서는 울지 않고 기도하려 무척 노력했다. 목사 아내는 남에게 특별하게 보여서는 안 됨을 새삼 느끼면서 조심하려 했지만…


일반적으로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면 웃음이 나지만, 눈물은 아프고 괴롭고 슬프고 속상할 때 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눈물은 참으라고 하는 것 같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행복이 보통일 때는 웃지만 아주 많이 행복할 때는 눈물이 난다. 슬퍼서도 울지만, 너무 기쁠 때도 눈물이 흐르지 않는가?


밤이 없으면 밝은 대낮이 없는 것처럼 우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기뻐할 때도 정말 기뻐할 수 없다고 한다. 또 울고 나면 기분이 맑아진다. 현대인이 메마른 것은 눈물이 메마르고, 눈물을 부끄러운 것으로 여겼기 때문은 아닐까?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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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1-06-02 21:4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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