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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예수님의 구원론은 이것이다. - 반론기고-이성우 목사님의 '예수님 구원론을 회복하라'를 읽고
  • 기사등록 2016-09-12 21:4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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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난 7월 24일자 들소리신문(제1604호) 8면에 특별기고된 이성우 목사의 글에 대해 이흥선 목사가 들소리신문(제1609호) 8면에 제기한 반론글 입니다. - 편집자주- >
,총신대 실천목회연구 교수. GoodTV복음특강 강사. 인천제일장로교회 담임.
얼마 전 들소리신문을 읽다가 이성우 목사님의 특별기고 “예수님 구원론을 회복하라!”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일부의 내용은 성경적이고 공감되는 내용도 있었지만, 구원론 등 몇 가지 내용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독자들이 이 목사님의 글을 읽고 성경적 예수님의 구원론이 진짜 이런 것인가? 하고 오해될 수도 있기에 부득이 반론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필자는 이 목사님의 인격이나 명예를 폄훼하기 위함이 절대 아님을 혜량바랍니다.

아울러 필자의 글에 대한 재반론을 언제나 환영하고 특별히 알미니안(웨슬리안 알미니안) 신학을 전공한 신학자들의 반론을 적극 환영합니다. 다만 신학적 토론은 소모적 논쟁이 될 수밖에 없기에 오직 성경적으로만 토론할 수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1. 일부 성경 부정과 교회사 왜곡, 부정하고 있다.

이성우 목사는 서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를 설명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천지창조와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 예수님은 완전하신 하나님이요 사람. 십자가 죽음, 천국을 선물로 주시기 위하여 성육신 하셨다" 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당연한 말씀이다. 그러면서 "이런 가르침을 예루살렘교회 이후부터 313년 이전까지는 그렇게 믿고 가르치며 실천하였는데 주후 313년 이후부터는 그대로 가르치고 살기를 거부함으로 많은 교회가 세속화되어 왔고 오늘의 불행을 가져온 것이다" 라고 주장하였다.

또 이어 “예수님 구원론은 뒷전이고 바울, 칼빈, 알미니안 같은 신학이론을 더 내세우더니 급기야 한국의 많은 교회들은 교리에 더 많이 치우친 나머지 예수 믿고 십자가 대속을 믿으며 교회당 출석만 해도 기본으로 천국은 갈 것처럼 강론을 해온 게 사실”이라며 “그 결과 1700년간 유럽과 미국과 한국의 기독교가 타락하여 무너지고 세인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라고 말했다. 이 목사님은 성경적인 예수님 구원론을 주장하면서 오히려 성경을 부인하는 결과를 낳고있다. 즉 성경에서 바울이 말한 구원관을 부정함으로 바울서신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바울이 말한 구원관은 예수님의 구원관과 100% 동일하다. 성경을 가감하거나 부인하면 이단이다.

콘스탄틴 대제는 주후 325년에 우리가 잘 아는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해 당시 혼란스럽던 교리 정리 작업을 논의하였고, 기독교의 가장 핵심 교리인 삼위일체(三位一體)교리를 공식 채택하는 등 교리 체계화를 꾀하였다.

새로운 신앙환경 조성으로 신학에 몰두한 아타나시우스, 갑바도기아 교부들, 제롬, 엠블로스, 어거스틴과 같은 위대한 교부들을 배출하며 신학체계를 발전시켰다. 이 목사님의 주장은 자칫 교회사 전체를 왜곡하거나 부정하고 있다. 마치 주후 313년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신앙이 타락하여 예수님 구원론을 부정해온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이 목사님이 서두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신 일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 주장은 성경의 핵심내용이고 교리인바, “주후 313년 이후부터 이렇게 가르치기를 거부하여 오늘의 불행을 가져왔다”라고 말씀하는 것은 근거 없는 거짓주장이다. 이 내용들은 성경의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내용이고 교리로서, 초대교회부터 현재까지 세계 모든 교회들이 그대로 믿고 있으며 전혀 변하지 않았다. 이 기본적인 내용을 거부한다면 그야말로 이단이다. 이 목사의 주장처럼 이를 믿지 않아서 모두가 타락한 것도 아니다.

2. 개역한글, 개역개정판 성경 인정 않고 있다.

이 목사께서는 “기독교가 주후 313년 천주교의 손에 넘어가 개혁을 외쳤던 그 시대 1570년경까지 인쇄술이 없던 시대에 성경을 필사해 오는 과정에서 36,000군데가 원어와 틀리게 기록하였고, 신약에서만도 2,200 단어가 삭제되었다는 것입니다(킹 제임, 전수성경 참고). 문제는 예수님 구원론을 그대로 가르치지 아니하고 변개하여 가르친 것이 가장 큰 범죄이며 루터가 종교개혁을 했다고는 하지만 오직 믿음,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 것만을 강조했고 예수님의 구원과는 거리가 멀고 칼빈이나 알미니안 역시 예수님 구원론에 미치지 못했으며(이후 생략)”라고 말했다.

이 목사님께서는 주후 313년에 기독교가 천주교로 넘어갔다고 주장하였는데 그렇지 않다. 초대교회(1-590년)는 단일교회로 유지되어 오다가 주후 1054년에 동방 희랍정교회와 서방의 로마 가톨릭교회로 분열되었다. 그리고 이 서방교회는 1517년에 종교개혁을 통해 신교(기독교)를 회복시켰다.

이 목사께서는 1570년경(종교개혁 직전의미-필자주)까지 인쇄술이 없던 시대에 성경을 필사하면서 성경이 변개되었다며 우리 한국교회가 사용하는 개역한글, 개역개정판 성경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킹제임스 성경만이 변개되지 아니한 유일한 성경임을 우회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 목사님의 이 같은 주장은 킹제임스 성경 이외에는 사탄이 변개한 성경으로서 개역한글(개역개정) 성경만으로는 구원을 못 받고 오직 킹제임스 성경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다가 합동측으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된 이송오 목사(말씀보존학회)의 주장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는 의구심이 든다.

3. 성경보다 사람의 체험을 더 강조하고 있다.

이 목사께서는 예수님 구원론을 강조하면서도 사람의 체험을 더 신뢰함으로써 성경보다 사람의 체험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 전자에서도 언급했듯이 성경에서 밝혀진 바울의 주장까지도 부인하면서 오히려 사람의 체험을 더 신뢰함으로써 신비주의나 인본주의에 빠지는 우를 범하고 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바울의 신학적 근거를 신뢰해서는 안 된다며 오히려 이 목사님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한국교회 몇몇 목회자들이 체험한 내용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 나라를 직접 체험하고 온 박영문 장로, 박용규 목사, 사형장 목격자 박효진 장로의 간증을 통해 확신을 얻었는데”라고 말했다.

이 목사는 또 “예수님의 구원과는 거리가 먼 칼빈이나 알미니안 역시 예수님 구원론에 미치지 못했으며 불행하게도 한국의 많은 교회는 칼빈의 구원론에 영향을 받아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인 것처럼 가르침으로 천국 가는 것을 마치 식은 죽 먹는 것처럼 가볍게 여겨왔던 것입니다. 실제로 최근 임상 체험을 통하여 천국, 지옥을 다녀온 박용규 목사는 난민수용소 같은 천국을 보여주는데 허름한 닭장같은 건물에서 수많은 목사, 장로, 권사, 신자들이 합숙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지옥에 가보니 교회 직분자들이 적지 않게 있더라”라고 소개하며 성경과 임상을 통해 이 목사의 주장이 성경적인 양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의 구원론을 강조하고 설명하려면 성경 속에서 답을 찾고 설명해 주어야 함에도 이 목사께서는 성경보다 사람들의 신비체험을 더 강하게 신뢰함으로써 오히려 비성경적 모순을 낳고 있다. 사람의 주관적 체험은 성경보다 앞설 수 없으며 절대 객관화 시킬 수 없다.

천국에서 난민수용소 같은 허름한 닭장 같은 데서 합숙생활을 한다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만일 그런 곳이 천국이라면 강남의 고급 아파트에서 사는 것이 천국보다 나을 것이다. 현재 살아있는 인간은 누구를 무론하고 천국이나 지옥에 갈 수 없다. 천국과 지옥은 반드시 죽어서만 가는 곳이고, 한번 가면 되돌아 올 수 없는 곳이 사후세계이다(눅 16:30-31). 사람의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는 순간을 죽음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죽기 이전에는 사람의 몸에서 절대 영(영혼)이 빠져나갈 수 없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천국과 지옥을 갔다 왔다는 주장은 전부 거짓이다. 다만 환상입신을 통해 본 것을 마치 영이 빠져나가 천국과 지옥을 본 것처럼 착각한 것이다.

4. 이 목사는 예수님의 구원론을 왜곡하고 있다.

이 목사께서는 예수님이 제시한 천국 길은 좁은 길(문)이라며 교인들 중에서 좁은 길을 걸어가는 교인과, 넓은 길(문)을 걸어가는 교인이 있는데 좁은 길을 걸어가는 교인보다 넓은 길을 걸어가는 교인이 더 많다고 예수님이 예언했다면서 좁은길을 걸어가는 사람만이 천국에 간다며 마태복음 7장 13-14절을 인용하고 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제시한 천국 가는 좁은 길이란 무엇일까요?” △불순종할 때 △미워할 때 △이웃을 주님께 하듯 사랑치 않을 때 △세상에 그 어떤 것(돈, 사람, 자기지식, 취미, 오락 등)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면 우성섬기는 죄가 되어 천국갈수 없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으면 주를 보지 못하리라 △또한 천국은 이기는 자가 가는 곳이라며 천국과 지옥여부의 잣대를 말하고 있다.

우선 이 목사께서는 마 7:13-14절을 왜곡하고 있다.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대상은 당시 성도가 아니라 외식으로 일삼으며 예수님을 영접치 않고 대적하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거짓 선지자들을 대상으로 하신 말씀이다. 넓은 길을 가는 사람들은 교인들이 아니라 바리새인 등 예수를 영접치 아니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마태복음 7장 전체의 해석은 지면상 다 말씀드리지 못하지만 기회가 되면 한 절 한 절 명쾌하게 해석해 드리겠다. 그동안 마태복음 7장은 많은 학자들과 목회자들이 본 뜻을 왜곡한 채 해석되어 왔다.

이 목사님의 주장대로 언급된 넓은 길(지옥 가는)로 가게 되는 대표적 사유 6가지가 구원을 받느냐 못 받느냐의 조건이 된다면 인간은 그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렇게 주장하신 이 목사님도 천국에 못 가게 될 것이다. 인간은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5. 한번 받은 구원은 영원하다.

이 목사께서는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인 것처럼 가르침으로 천국 가는 것을 마치 식은 죽 먹는 것처럼 가볍게 여겨왔다”고 말하며, 한번 구원은 영원하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필자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한번 받은 구원은 반드시 영원하다. 만일 이를 부인한다면 이것이 진짜 이단사상이다.

간단히 설명하겠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만 가능하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이 내 영에게 임하는 순간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의 영(영혼)을 살리신다(엡 2:1,5, 히 10:19, 22, 벧전 1:2, 19). 이것을 구원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선물은 공짜로 받기 때문에 선물이라고 말한다. 선물이기에 은혜라고 말한다. 구원은 은혜로 받는 것이다(엡 2:5). 영이 죽은 자가 구원을 얻기 위하여 행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유는 죽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인정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만 구원이 성취된다. 예수의 피가 임해서 구원받은 자는 어떤 이유로도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고 영원히 보존된다.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효력이 영원하기 때문이다. 만일 예수님의 피가 임해 구원받았는데 다른 이유로 구원을 잃어버린다면 예수의 피 효력은 일시적이 된다. 이는 예수의 피를 부인하는 무서운 이단사상이다. 그렇다면 이 피는 구약에서 제사장이 지성소에 뿌리는 양의 피와 다를 바 없다.

왜 한번 받은 구원은 영원한지의 설명은 지면상 간단하게 설명한 것으로 대신한다. 지면이 허락된다면 향후 이 부분만 집중적으로 말씀드리고 토론할 수 있음을 말씀드린다.

6. 가시적 성전 무너졌고 심령 성전 건설됐다.

이 목사께서는 기고에서 종말의 현상을 언급하면서 “종말의 시계표가 크게 3가지인데 마 24장 32절의 무화과나무 비유이며, 이스라엘의 제3성전 건축과 계시록 13,14장의 짐승표(베리칩)의 진행 속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라고 주장하였다. 마 24장 32절의 설명을 이해하려면 24장 전체를 해석해야 하는데,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마 24장은 종말 때 사건 같지만, 사실은 십자가 때 사건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겉으로 보면 꼭 종말 때 사건 같다. 이에 대한 설명은 많은 지면을 필요로 해야만 하기에 생략하기로 한다.

우선 간단하게 2가지만 간략하게 설명하겠다. 필자가 생각건대 제3성전 건축이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의미하는 것 같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이미 무너졌다. 학자들은 주후 70년에 로마 티토장군에 의해서 무너졌다며 예수님의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다. 눈에 보이는 성전은 예수님이 십자가 때 성전을 동시에 훼파하셨다.

성전은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는 휘장이 있음으로 성전의 기능이 존재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성전 되신 자신의 몸을(히 10:20)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다(마 27:51). 이때 휘장이 찢어져 둘이 되었다고 했다. 둘이 되었다는 말은 성소와 지성소의 구분이 사라졌다는 말이다. 성전은 반드시 휘장이 있어야만 성전의 기능이 유지된다. 휘장이 찢어져 둘이 되었다는 말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람들이 성전이라고 부르고 양의 피를 가지고 제사를 드리지만 예수님은 더 이상 성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창고가 돼버린 것이다.

구약에서 눈에 보이는 성전은 모두 성전 된 예수님에 대한 예표이고 모형이다. 성전 된 예수님이 오심으로 더 이상 눈에 보이는 성전은 필요 없게 되었다. 성전 된 예수님이 우리 영 가운데 영접하게 되면 우리가 곧 성전이 된다(고전 3:16, 17; 6:19).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전된 우리 몸은 거룩하다(고후 6:16, 히 10:10, 벧전 2:9).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삼위 하나님이 우리 영 가운데 거하게 됨을 말한다. 원래 우리 영은 죄와 허물로 죽었고, 마귀가 장악하여 왕 노릇 하고 있었다. 예수를 영접할 때 예수님이 오셔서 마귀를 내쫓고 내 영을 거처삼아 계시기에 성전이 되는 것이다.

한번 성령님과 예수님이 오셔서 내 안에 거하여 성전을 삼으면 절대 그 성전은 마귀에게 빼앗기지 않는다(요 10:28-29). 그리고 영원히 내 영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 구원이 보장되는 것이다. 한번 받은 구원(인침)은 영원히 보장되는 또 다른 이유는 성령님이 보증하시기 때문이다(요 14:16, 엡 4:30).

7. 짐승표가 베리칩이 결코 아니다.

이 목사께서는 종말의 시계표로 계 13, 14장에 나오는 777짐승표가 베리칩이라고 주장한다. 계13장 16-18절에서 나오는 오른 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는데 이것이 짐승의 수인 666이라는 숫자인데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하여 베리칩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간단히 설명하면 여기에서 나오는 짐승의 표는 실제 사람의 몸에다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 영에다 새겨 놓는 것을 말한다. 마찬가지의 형태로 성도의 이마에도 하나님과 어린양의 이름을 새기는데 육체를 말하는 것 같은데 영에다 새기는 것을 의미한다(계 14:1). 이마라고 표현하는 것은 우리 몸의 중심부분이기에 인간의 수준에 맞춰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마귀의 수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것들이 영에다 새기는 것인지 아니면 육체에다 새기는 것인지를 해석하려면 13장 18절에 그 해답이 있다. 짐승의 수인 666을 세어 볼 수 있는 자는 ‘지혜와 총명한 자’만이 세어 본다고 하였다. 이 지혜와 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인데 곧 하나님의 자녀만이 이 수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만일 육으로 보이는 베리칩이나 물질적인 것이라면 영적 지혜와 총명이 없는 불신자라도 이 수를 보게 될 것이다. 베리칩을 이식하는 직원이 불신자라면 당연히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육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더 자세한 설명은 차후에 설명하겠다.

끝으로 지면관계상 충분하게 설명하지 못함을 독자여러분과 이성우 목사님께 양해바라며 더 궁금한 사항은 필자에게 문의해 주시면 자세하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출처인용=들소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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