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 기자
예전에 후배 목사가 자신이 시무하는 교회에서 설교를 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신천지가 한 구역을 잡아먹었다는 것이다. 주일 낮 예배에 신천지 관련 설교를 해달라고 했다. 후배 교회에서 설교하는 동안 신천지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내게 주어진 시간 동안 나는 복음이 무엇인지 설교했다.
설교를 마친 뒤에 낯이 익어 보이는 한 성도가 내게 인사를 했다. 그는 신천지에 빠졌던 성도였다. 아내가 먼저 빠지고 나중에 가족 전체가 신천지에 갔다.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나오려고 했지만 아내가 이혼하고 나가라고 해서 결국 이혼하고 홀로 신천지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 성도는 내게 “목사님들이 설교 시간에 성경을 이야기 하지 않고 예화와 함께 성경과 무관한 이야기만 늘어 놓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복음에만 충실한 설교를 하는 목사를 만나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낯이 익었던 그 성도는 오래 전에 다녔던 교회의 유치부 부장 집사였다. 정말 마음이 아팠던 기억이다. 그는 성도들이 이단에 빠지는 데는 목회자들의 책임이 크다고 말했다.
성도가 이단에 빠지는 이유가 단지 목사에게만 책임 있다고 볼 수는 없지만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맞다. 목자가 양무리를 잘 지키고 꼴을 잘 먹이듯이 목사는 성도들에게 영의 양식을 잘 먹여야 한다. 늑대와 이리에게 양을 빼앗긴다면 그것은 목자의 책임이 크다. 제대로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목회자의 책임만 돌려서는 안 된다. 수많은 이단에 빠진 성도들을 만나서 상담해 보면 한결같이 하나님을 잘 믿고 싶은 것 밖에 없었는데 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한탄하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느끼는 것 중에 하나는 이단에 빠진 이들 역시 그 근저에 자기 욕심이 있다는 것이다. 좀더 하나님을 깊이 알고자 하는 열망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그 중심이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주도권일 때가 문제다. 그 욕심이 미혹에 빠지는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영적이 눈과 귀를 가려서 분별하지 못하게 하는 틈바구니를 놓치지 않고 미혹에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단에 빠지는 성도들 역시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이단은 거짓말의 앞잡이
이단들의 특징 중에 하나는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한다는 점이다. 특히 최근 한국교회에 기승을 부리는 신천지의 경우가 심하다. 그들은 심판 받을 마귀들에게는 붙잡혀 있는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정말 기막힌 마귀적인 생각이다. 왜냐면 하나님은 거짓말과 식언을 하지 않는 분이라는 점에서 거짓말 하는 쪽은 마귀일 수밖에 없다.
우리 집 둘째 아들이 이런 거짓말에 속아 넘어갈 뻔했다. 아들은 군대를 제대하고 난 뒤에 부대의 전역 동기나 후임을 가끔 만나고는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전역 친구들을 만나고 와서는 대뜸 “아빠, 후임 친구를 카페에서 만났어요. 바쁘다고 못나온다고 해서 그러나 보다 했는데 우리가 간 카페에서 우연히 만났어, 아는 선교사님과 약속이 있었는데 하필 그 카페에요. 그래서 이 그 선교사과 이런 저런 이야기 나누고 왔어요.”라고 했다.
그런데 둘째는 그 선교사와 군대 친구들과 후배들과 다시 만나기로 했다고 했다. 두 번째까지는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세 번째 모임에는 성경 공부를 하러 간다고 했다. 그래서 “네가 집에서 배운 성경으로도 충분할 건데 뭘 더 배운다고 성경 공부하러 가니?”라고 물었다. 그러다가 문뜩 신천지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아들에게 신천지가 접근하는 방식을 말해주고 선교사가 그렇게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아들은 그런 것 같다고 했다. 너무 교회를 비판하고 성경을 푸는 것이 이상해 보였다고 했다. 십중팔구 신천지였다.
아들에게 친구들에게 먼저 만나서 신천지라고 일러주고 선교사를 만나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부대 친구들은 선교사가 신천지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에 일단 만나야 한다고 해서 결국 만났다. 아들은 선교사에게 내가 가르쳐준 대로 질문을 했다. 선교사는 다닌 신학교나 소속 교회 그리고 사역에 대해 정확하게 밝히지 않고 그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슬쩍 넘어가려고 했다고 한다. 또한 성경 해석에 대한 몇 가지 문제를 지적했더니 도리어 아들이 이상하다는 식으로 반응했다는 것이다.
신천지의 접근 방식은 결국 속이는 것으로 시작한다. 신천지뿐만 아니라 다른 이단들도 기본 바탕이 속임수이다. 기존 성경 해석과 너무 다를 때 일단 의심해야 한다. 이단들이 교회의 문제를 비판하고 목사들을 비판하는 것이 좋은 도구가 되는 한국교회 현실이 정말 안타깝다. 그러나 한국교회나 목사들이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전체를 매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목욕물이 더러우면 물만 갈아주면 되는데 욕조 안에 있는 아기마저 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신천지나 기타 이단들은 마치 한국교회가 문제가 많아 없어져야 하는 것처럼 이야기 하는 것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된다. 그 자체가 이단에 빠지기 쉬운 일이다.
이단의 미혹은 영적인 문제
이단에 빠지는 이유는 단순히 성경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여기에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것보다 영적인 미혹이 그 근본적인 원인이다. A동산이라는 곳에 들어갔던 사람들 중에는 목사도 있었다. 그는 자신의 딸이 그곳에서 몽둥이에 맞아 죽었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던 사람이다. 나중에 내분이 일어나면서 증인으로 나섰던 그는 내게 “나를 목사로 부르지 말라”고 했다. 그는 비록 신학을 하고 목사 안수까지 받았지만 영적인 미혹에 빠졌던 것이다.
이단에 빠지는 문제는 교리적인 문제와 함께 영적인 문제까지 포함해서 진단할 필요가 있다. 이단들에게는 미혹의 영이 함께 역사한다. 어둠의 영이 눈을 가리우면 어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교리를 가지고 설득해도 이단에 빠진 성도들은 미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핍박이라며 순교적 태도로 이단들과 더 결속한다.
미혹의 영은 사람들의 눈을 가리운다. 오대양 사건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은 적이 있다. 그들 중에는 신학교 교수의 아내와 그의 딸도 있었다. 그 교수는 청년 시절에 다녔던 교회의 협동 목사로 있었던 분이다. 역사신학 교수로 계셨던 그 교수는 결국 그 사건으로 인해 학교에서 교수직을 내려놓아야 했다. 이단의 문제는 단순한 논리의 문제만이 아니라 언제가 영적인 어둠의 역사가 함께 한다.
목사는 성경의 가르침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성경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 말씀은 그냥 문자가 아니다. 신학을 깊이 해도 성경에 대해 성령님의 조명이 있지 않으면 단순히 지식이나 정보에 머무른다. 목사가 성령에 충만해야 함은 물론 성도들 역시 그 삶을 살도록 최선을 다해는 것이 목사의 일이기도 하다.
복음을 가르치는 중요성
목사는 성도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영적으로 잘 성장할수록 도와주어야 한다. 교회의 조직을 위해 성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닌 회중적 성격이 강하다. 즉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지체들의 모임이다. 그러므로 교회 중심이라는 것은 건물이 아닌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성도들의 교제가 있어야 한다.
초대교회 일곱 집사들은 교회 공동체의 규모가 커지면서 생긴 교회 조직의 각종 행정문제를 처리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성령에 충만한 이들이었다. 스데반 집사는 행정을 잘못해서 순교 당하지 않았다. 오히려 복음 때문에 죽음을 당했다. 빌립 집사 역시 그의 행적은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가득 차 있다. 즉 교회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제자와 증인의 삶이다. 그 가운데는 언제나 성령님이 함께 했다.
위조지폐를 찾아내는 감정사는 위조지폐에 집중하지 않고 진짜 지폐에 집중한다. 진짜를 제대로 알면 그냥 위조지폐를 분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단에 빠지지 않는 방법 중에 하나는 복음에 집중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가르치셨다. 바울도 동일한 것에 집중했다. 그것은 십자가의 구속과 함께 이룬 것들, 즉 단순히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의 정체성과 함께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삶을 사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듯이 우리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이 땅에 보냄을 받았다. 또한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사역을 하셨듯이 우리 역시 성령님께 사로잡혀 그 기름부음과 능력으로 일할 수 있도록 하신다. 이것이 복음이다.
또 하나, 이단에 빠지지 않는 방법 중에 하나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사는 것이다. 이단에 빠지는 문제는 단순한 교리적 문제이기보다 영적인 문제가 포함되어 있다. 바른 성경과 교리를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설득해도 이단의 교리를 포기하지 않는다. 미혹의 영들을 물리쳐야 한다. 이에 대한 답은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이다.
성령을 따라 사는 것은 어떤 신비적인 은사를 가져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육체가 자라서 유지하기 위해서는 음식을 먹어야 하듯이 영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한다. 그것은 단순한 지식적 작업이 아니다. 성경을 묵상하는 것이 영으로 먹는 것의 시작이다.
말씀을 지속적으로 먹기
개역성경에는 ‘묵상’으로 번역했지만 개역개정은 ‘읇조리다’로 번역하고 있다. 헬라어 ‘호몰로기오’라는 말이 ‘읇조리다’, ‘동일한 것을 지속적 고백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시 119:97)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들의 영적인 삶의 양식일 뿐만 아니라 일상의 길이자 빛이다.
영으로 먹는 것은 말씀을 읽고 고백하는 것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다. 단순함 암기가 아니라 소리 내서 읽고 읇조리는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자신의 육신의 귀를 통해 듣고 그것이 마음에 심기어져 믿음으로 자라게 하는 것을 해야 한다. 믿음은 말씀을 들을 때 자란다. 이때 우리 가운데 성령께서 그 말씀을 조명하고 깨닫게 하여 영적인 성숙이 일어난다.
또한 예배와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의 교제가 있어야 한다. 교제라는 것은 단순히 교회에 와서 교회 일에 매이는 것이 아니다. 복음을 나누고 서로 기도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일이다. 이런 것이 중심으로 있을 때 성령께서 우리는 온전히 자라게 하신다.
성도가 이단에 빠지는 문제는 단순한 하나의 원인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매우 다양한 원인과 이유가 있는 매우 복합적인 문제이다. 그러나 복음으로 올바르게 서고 성도들의 교제와 성령으로 깨어 있으면 쉽게 분별이 된다. 교회는 이것에 힘써야 한다.